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촉매가 됐다. 한국문학번역원 지원 도서의 해외 판매량은 2023년 52만 부에서 2024년 120만 부로 1년 만에 130% 이상 뛰었다. 그 흐름을 타고 에세이 한 권이 유럽 9개국에서 5억 원 선인세를 기록하고, 스릴러 소설은 9개국에서 10억 원대 계약서를 받아 들었다. 숫자만 보면 화려하다. 다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이 변화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노벨상이 바꾼 풍경
201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당시 한국문학 번역 출판을 지원받으려는 해외 출판사의 신청 건수는 전 세계를 합쳐 68건이었다. 영미권만 떼어 내면 10건이었다. 한강이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을 받던 해다.
그로부터 9년이 지난 2025년, 전체 신청 건수는 383건으로 다섯 배 넘게 불어났다. 영미권 신청도 30건으로 세 배가 됐다. 번역 출간이 이뤄지는 언어권 역시 16개에서 31개로 두 배 확대됐다. 2024년에는 폴란드어 번역 종수가 13종으로 독일어(10종)를 처음 앞질렀다. 유럽 중부의 비교적 작은 언어 시장이 독일어를 제친 건 예상 밖의 신호다.
전수용 한국문학번역원장은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K북의 위상을 바꿔 놓았다"고 말했다. 단, 그는 배경으로 K팝과 드라마, 영화 등 한류 콘텐츠 전반의 확산도 함께 꼽았다. 노벨상이 불을 붙였다면, 10여 년간 쌓인 한류의 신뢰가 장작이었다는 뜻이다.
억 소리 나는 선인세, 그 실체
2024년 한 해에만 번역원 지원으로 출간된 한강 작품 77종이 28개 언어권에서 31만 부 팔렸다. 종당 평균 판매량도 1,271부로 관련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이래 최고치를 찍었다. 5,000부 이상 팔린 책이 45종, 1만 부를 넘긴 책도 24종에 달했다.
수치의 열기는 판권 시장으로 그대로 번졌다. 보경스님의 3부작 에세이 '어느 날 고양이가 내게로 왔다'는 영국·독일을 포함한 유럽 9개국에 수출되며 총 선인세 약 5억 원을 기록했다. 불광출판사 창사 이래 최대 규모 판권 계약이었다. 강민영 작가의 스릴러 소설 '식물, 상점'은 영국·프랑스 등 9개국에서 10억 원대 계약이 성사됐다. 이종산 작가의 소설집 '고양이와 나'와 자기계발서 '조종당하는 인간'도 각각 복수의 언어권에서 누적 선인세 1억 원 이상을 확보했다.
펭귄 랜덤하우스, 아셰트 같은 북미·유럽의 대형 출판사들이 한국 문학 출간에 더 적극적으로 나선 것도 이 무렵부터다. 정보라의 '저주토끼',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은 3년 연속 4,000부 이상 해외 판매를 기록하며 K북 스테디셀러로 굳어졌다. '한강 이후'라는 표현이 자연스러워진 이유가 여기 있다.
반짝 효과인가, 구조적 변화인가
짚어둘 게 하나 있다. 120만 부라는 숫자에서 31만 부는 한강 작품이 만들어 낸 몫이다. 단순 계산이지만, 한강을 뺀 나머지 작품들의 판매량은 약 89만 부다. 전년도 전체 합계(52만 부)보다는 여전히 높지만, 구성을 보면 한 작가에 대한 의존도가 상당하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시장 다변화에 대한 과제는 현장에서도 거론된다. 배혜은 북경대학교 문화산업연구소 연구원은 중국 시장을 분석하며 "독자들의 소장 욕구를 자극하는 전략이 장기적인 판매 확대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특정 작가의 프리미엄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현지 독자의 취향과 구매 행동을 겨냥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맥락이다. 장르 다변화와 현지화 전략이 다음 단계의 숙제로 남는다.
IP로 뻗어나가는 K북
한국문학번역원은 2025년 'K-Literature Fellowship' 저작권 수출 지원사업을 역대 최대 규모인 해외 20개사·국내 28개사 등 48개사 참여로 진행했다. 전수용 원장은 이 사업을 "단순한 교류를 넘어 실질적인 저작권 거래 성과 창출에 집중한 프로그램"으로 규정했다.
주목할 대목은 IP 확장성이다. 넷플릭스 드라마로 제작된 정세랑의 '보건교사 안은영', 영화로 만들어진 '전지적 독자 시점' 같은 작품들이 해외 출판사의 관심을 끌고 있다. 드라마·영화가 원작 책의 수요를 만들어 내는 방향, 거꾸로 책이 미디어화되며 다시 독자를 끌어오는 방향 — 두 흐름이 동시에 움직이는 셈이다. 2025년 상반기 번역출판 지원 신청 건수는 193건으로 전년 동기보다 약 20% 늘어 흐름이 꺾이지 않았다는 점도 확인됐다. 시인 김혜순이 '죽음의 자서전'으로 아시아인 최초로 독일 국제문학상(HKW)을 수상한 것처럼, 한국문학이 쌓아 가는 국제 수상 이력도 시장 신뢰를 한 겹씩 더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