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10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한-EU 정상회담을 계기로, 유럽 첨단기업 4개사가 총 1억 6500만 달러(약 2500억 원) 규모의 한국 투자를 신고했다. 같은 날 한-EU 디지털통상협정(DTA)이 공식 서명됐고, 통상·투자·공급망·첨단기술·에너지를 아우르는 '한-EU 경쟁력 파트너십' 출범에도 합의했다. 한국 정상의 브뤼셀 방문은 2018년 이후 8년 만이다.
이번 회담의 배경
EU는 한국의 제3위 교역국이자 제1위 파트너 투자국이다. 18조 유로 규모의 GDP와 4억 50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단일 시장으로, 한국 기업에는 미국·중국과 함께 핵심 수출 거점이다. 양국은 올해로 발효 15년 차를 맞는 한-EU FTA를 토대로 관계를 이어왔지만, 디지털 경제와 공급망 재편이라는 새 의제에서는 별도의 틀이 필요했다.
안토니우 코스타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회담에 앞서 "EU와 한국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개방적이고 공정한 무역이라는 공동의 가치를 공유하는 파트너"라고 밝혔다. 이번 회담이 단순한 의전이 아니라 구체적인 협정 서명과 투자 신고를 동반했다는 점이 그 말에 무게를 더한다.
2500억 투자 신고와 DTA 서명
산업통상자원부와 코트라는 이날 브뤼셀에서 '유럽지역 투자신고식' 및 '유럽투자가 라운드테이블'을 공동 개최했다. 독일 첨단소재기업 오라폴(Orafol)은 지난해 인수한 반사 필름 분야 한국 기업의 공장 증설을 신고했다. 네덜란드 프로드라이브 테크놀로지스(Prodrive Technologies)는 반도체 등 첨단산업 장비 모듈 수입·판매를 위해 한국 법인을 처음으로 설립하기로 했다.
여한구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과 마로시 셰프초비치 EU 통상·경제안보 집행위원은 양측 정상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한-EU DTA에 정식 서명했다. DTA는 한국이 싱가포르에 이어 두 번째로 체결한 양자 디지털통상협정이자, 5대 교역 상대국과 맺은 첫 번째 협정이다. 협상 타결 선언은 2025년 4월이었고, 약 14개월 만에 서명까지 이르렀다.
DTA의 핵심 조항은 컴퓨팅 설비·데이터 현지화 원칙적 금지다. 한국 기업이 EU에서 수집한 데이터를 현지 데이터센터 없이 국내 서버에서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전자 서명·인증, 전자 송장 등 전자상거래 원활화 조항도 포함돼 있어, 중소 규모 디지털 기업의 EU 진출 문턱이 낮아질 전망이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한국의 경쟁력 있는 첨단산업 공급망과 AI 생태계가 유럽 기업들에 새로운 협력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성과 이면의 변수
다만 짚어둘 대목이 있다. DTA는 서명 이후 양측 의회 비준을 거쳐야 발효된다. EU 의회 비준 절차는 통상 수개월에서 1년 이상 걸리는 경우가 많아, 기업이 실질적인 혜택을 누리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번 투자 신고액 2500억 원도 맥락이 필요하다. 신고액은 실제 집행 금액이 아니며, 공장 증설이나 법인 설립 계획이 시장 상황에 따라 조정될 수 있다. 반도체·배터리 공급망을 둘러싼 미-EU-한국 간 정책 변수도 여전히 남아 있다. 한 통상 전문가는 DTA의 데이터 현지화 금지 조항이 특정 산업군—금융·의료 등 규제 민감 분야—에서는 EU 회원국 별도 규정과 충돌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승객 예약자료 전송 협정 타결, 비밀정보보호협정 협상 개시 합의도 이날 이루어졌다. 이 협정들은 실무 단계에서 세부 사항이 구체화돼야 실효성이 확인된다. 경쟁력 파트너십 역시 출범 합의 수준으로, 세부 로드맵은 후속 실무 협의에서 나온다.
다음 단계: 비준과 후속 협력
이번 회담에서 합의된 내용 중 즉시 효력을 갖는 것은 투자 신고뿐이다. DTA와 경쟁력 파트너십은 각각 비준 절차와 후속 협의라는 관문이 남아 있다. 배경훈 부총리 겸 과기정통부 장관은 벨기에 루벤의 국제 반도체 연구개발기관 IMEC에서 약 120명의 한인 연구자들과 만찬 간담회를 갖고, AI·양자·바이오 분야 과학기술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K-문샷 전략의 핵심 거점 NAIS를 기반으로 AI 활용 연구 및 과학데이터 공유 협력'을 제안했다고 밝혔다.
산업부는 DTA 비준 일정과 경쟁력 파트너십 첫 번째 공식 회의 시점을 다음 협의 마일스톤으로 예고하고 있다. 한-EU 관계가 FTA 중심의 상품 교역 프레임에서 디지털·기술 협력 중심으로 재편되는 흐름은 이번 회담을 기점으로 뚜렷해졌다. 관련 세부 사항은 산업통상자원부 및 EU 집행위원회 공식 발표에서 확인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