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 CEO 젠슨 황이 2026년 6월 4일 저녁 한국에 도착했다. 컴퓨텍스 2026 기조연설을 마친 직후였다. 5일부터 8일까지 나흘간, 그는 서울을 거점으로 국내 산업 전반을 가로지르는 일정을 소화했다.
방한 전 대만에서 먼저 불 지폈다
젠슨 황은 방한에 앞서 6월 1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코리아 파트너스 나이트'를 처음으로 열었다. SK하이닉스·삼성전자·LG전자·두산로보틱스·네이버클라우드 등 30개 이상 한국 기업 관계자 약 100명이 초대됐다. 엔비디아가 단일 파트너 국가를 위한 별도 만찬 행사를 개최한 건 이때가 처음이다.
그는 이 자리에서 방한 목적을 직접 밝혔다. "그들에게 축하를 전하고, 감사 인사도 하고, 올해 하반기를 함께 준비하고 싶다. 무척 바빠질 것이다." 한국과 대만의 반도체 산업을 비교하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다. "대만도 특별하고, 한국도 특별하다. 두 곳이 동시에 특별할 수 있다."
GPU 26만 기 협약, 이번 방한으로 구체화
이번 방한의 직접적 배경은 지난해 10월 31일 경주 APEC CEO 서밋에서 체결된 협약이다. 당시 엔비디아는 한국 정부 및 삼성전자·SK그룹·현대차그룹·네이버클라우드와 함께 GPU 26만 기 이상을 국내에 공급하기로 합의했다. 규모는 한국 정부(과학기술정보통신부) 5만 기, 삼성전자·SK그룹·현대차그룹 각 5만 기, 네이버클라우드 6만 기로 배분됐다. 초기 물량 1만 3000기는 블랙웰 GPU로 먼저 풀렸다. 협약 추정 규모는 2030년까지 78억~105억 달러에 달한다.
6월 5일 젠슨 황은 최태원 SK그룹 회장·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구광모 LG그룹 회장·이해진 네이버 의장을 서울에서 차례로 만났다. 협의 의제는 HBM 메모리 공급에 그치지 않았다. AI 팩토리 구축, 자율주행, 로보틱스 플랫폼, 소버린 LLM 개발, 6G AI-RAN까지 범위가 폭넓게 논의됐다. SK텔레콤은 엔비디아 '옴니버스' 플랫폼을 활용해 반도체 팹 디지털 트윈을 구현 중인 제조 피지컬 AI 파트너로 이미 소개된 상태다. LG전자의 휴머노이드 로봇 'CLOiD'는 엔비디아 칩셋과 Isaac 로보틱스 플랫폼을 기반으로 디지털 트윈 환경에서 학습한다.
7일에는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와 별도로 만나 게임과 피지컬 AI 협력을 논의했다. 방한 마지막 공식 일정인 8일에는 서울 신라호텔에서 국내 AI·로봇 스타트업 및 서울대·KAIST·연세대 연구진과 비공개 간담회를 처음으로 가졌다. 에이로봇·엔닷라이트·리얼월드 등 엔비디아 '인셉션 그랜드 챌린지' 선정 기업, AI 스타트업 업스테이지·노타·베슬AI 등이 자리를 함께했다.
기대만큼 남은 변수도 있다
다만 짚어둘 게 있다. 이번 회동에서 구체적인 계약 조건이나 추가 공급 규모가 공개된 건 없다. 총수 면담과 스타트업 간담회 모두 '비공개'로 진행됐고, 이후 발표된 공동 성명도 없었다. 협력의 방향성은 제시됐지만, 각 기업이 실제로 어떤 형태의 공동 개발이나 계약을 추진할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은 상태다.
글로벌 AI 인프라 경쟁에서 한국이 핵심 파트너 지위를 확보했다는 평가와, 엔비디아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아질 수 있다는 우려는 공존한다. 정보통신기획평가원 홍진배 원장은 컴퓨텍스에서 "한국은 세계 최대 메모리 공급국인 동시에 피지컬 AI 수요 거점이라는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독자적인 AI 칩 생태계 없이 엔비디아 GPU 중심으로 인프라가 집중되면 공급망 리스크도 함께 커진다는 지적도 업계 일각에서 나온다.
다음 마일스톤은 'GTC 서울' 가능성
젠슨 황은 GTC 타이베이 기자회견에서 서울 GTC 개최 가능성을 직접 거론했다. "서울이 원하면 열겠다"는 발언이다. 엔비디아의 주요 개발자·파트너 행사가 서울에 열린다면, 협력 관계는 현재의 인프라 계약 수준을 넘어 생태계 구축 단계로 본격 진입하는 신호가 된다. 배포 예정인 GPU 물량이 실제 산업 현장에 얼마나 빠르게 흡수되는지, 그리고 로보틱스·소버린 AI 분야에서 어떤 공동 프로젝트가 가시화되는지가 이번 방한 성과를 가늠하는 다음 기준점이 될 전망이다.




